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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왜 한국에선 힘 못쓸까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감독 샘 테일러-존슨)는 북미 지역에서 1억4739만1785달러(박스오피스 모조 집계)를 벌어들였다(3월1일 기준). 우리 돈으로 1625억원이 넘는다.

이 영화가 해외에서 거둔 수입은 더 어마어마하다. 57개국에서 개봉해 3억3840만 달러를 끌어모았다. 3800억원 규모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제작비는 한화로 약 440억원, 400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도 성공할 줄 알았다. 국내에 잘 알려진 배우는 출연하지 않지만, 자극적인 소재와 해외에서의 성공 소식이 국내 관객의 궁금증을 자극할 줄 알았다.

그런데 참패하고 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국내 개봉 첫날(2월26일) 512개 스크린에서 2313회 상영돼 4만5653명이 봐 4위에 오르는 데 그쳤다(영화는 56개국 개봉 당일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6만7629명이 이 영화 최다 관객 수다. 2일 현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국내에서 21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극적 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이쯤되면 일단은 회생이 쉽지않아 보인다.

◇완벽하지만, 위험한 남자 크리스천 그레이

영화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다. 평범한 여대생 아나스타샤(아나스타샤를 연기한 다코타 존슨의 외모는 평범하지 않다)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27세의 갑부 크리스천 그레이(제이미 도넌)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일반적인 '완벽남-평범녀'의 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그레이라는 완벽한 남자의 성적 취향이 꽤나 독특하다는 것이다. 그레이는 S-M, 즉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을 즐긴다. 헬기 위에서 시애틀의 야경을 즐기고, 졸업 선물로 스포츠카를 받고, 아침마다 그가 치는 피아노 연주를 들으려면 이 완벽한 남자의 위험한 성적 취향을 받아들여야 한다.

전형적이지만 야릇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영화는 왜 한국에서만 실패했을까?

◇수준 이하의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영화의 완성도다. 영화 관련 웹사이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로튼토마토(rottentomatoes)와 아이엠디비(IMDB), 메타크리틱(metacritic)에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10점 만점에 5점을 넘기지 못했다. 로튼토마토에서는 24%(100% 만점), 아이엠디비에서는 4.2점, 메타크리틱에서는 3.8점이었다. 국내 평도 다르지 않다. 별 두 개 이상을 준 평론가는 없었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관습적이고, 상투적이고, 뻔하고, 긴장감이 없고, 유치하고, 오글거리고, 캐릭터가 불분명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없고, 심지어 그렇게 야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영화는 실제로 그랬다. 결정적으로 극의 알맹이인 '성적 긴장감'이 빠져있다.

◇외화에 대한 명확한 수요

그렇다면 이런 의문점이 든다. 외국 관객이라고 이 영화의 단점을 모를 리 없지 않냐고. 그렇다. 한국 관객도 그들과 같은 영화를 봤다. 그런데 도대체 왜 '한국에서만' 이 영화가 안 먹히는 걸까.

힌트는 지난 3년간 국내 개봉 외화 박스오피스 순위에 나와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을 보면, 지난해 박스오피스 1~10위에 오른 외화 중 이른바 액션 블록버스터 혹은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닌 작품은 '비긴 어게인' 한 편뿐이었다.

2013년에는 '어바웃 타임'과 '레 미제라블' 두 편, 2012년엔 10위권 안에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닌 작품은 아예 한 편도 없었다.

한국 관객의 외화에 대한 수요는 우리 자본과 기술력으로는 제작할 수 없는 영화에 온전히 쏠리고 있다. 이제 액션 블록버스터가 아닌 멜로, 사극, 드라마, 코미디 등 장르에 대한 욕구는 한국영화만으로도 충족이 된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박스오피스 1~10위에 오른 한국영화를 보면 이보다 더 다양한 장르를 배치하기 힘들 정도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할리우드의 위상이 최소한 한국에서는 무너졌다"며 "한국영화의 발전과 함께 국내 관객은 할리우드 영화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짚었다.

◇한국에는 없는 원작의 힘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큰 성공 뒤에는 원작의 힘이 있었다. E L 제임스의 동명 소설은 전 세계적으로 1억부 이상이 팔린 '메가 히트' 베스트셀러다. 원작은 파격적인 성애 묘사로 '엄마들의 포르노'로 불리며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해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최소 1억명은 자신이 읽고 상상했던 것이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됐을지 궁금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상대적으로 국내에서는 많이 팔리지 않았다. 출판사 시공사가 2012년 8월 한국어판으로 내놓은 이 책은 3년 동안 37만 부가 팔렸다. 전자책까지 합하면 55만 부가 나갔다. 비율로 따지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한국 지분은 0.37%에 불과하다. 잠재적인 수요층이 그만큼 적었다.

국내 출판시장의 현실을 고려하면 37만 부를 적다고 할 순 없지만, '열풍'반열엔 못 올라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 S-M 성적 판타지, 한국선 별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영화와 소설이 매우 관습적인 서사구조로 짜여져 있음에도 성공을 거둔 이유는 결국, 극이 제공하는 성적 판타지와 관련이 있다.

섹슈얼리티에 관한 탐구가 발달한 서양 문화권에서 남녀간의 가학적·피학적 성행위는 단순히 '변태 성행위'가 아닌 '성적 판타지'에 속한다. 영화에서는 완화됐지만, 원작 소설이 묘사하는 사도마조히즘의 수위는 포르노급이어서 독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엄마'들은 여기에 홀렸다.

상대적으로 성에 폐쇄적인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성애 묘사가 거북하게 다가온다. 그레이가 아무리 멋진 남자여도 기묘한 성적 취향을 갖고 있다면 그냥 '변태 성욕자'일 뿐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다양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던 한국영화 '페스티벌'이 개봉했을 때 관객의 반응이 비슷했다"며 "동성애를 다룬 영화에도 거부감이 있는 마당에 S-M은 아직 한국 관객이 받아들이기 힘든 취향이다"라고 지적했다.

영화 외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외설적 영화를 당당하게 보러갈 '엄마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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